
시장 한 켠에서 2대 째
시계수선의 명품을 잇는 곳
작은 가게 안 옷을 짓는 엄마와 시계를 고치는 아들이 함께 일하는 공간
일 성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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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시장 골목 안. 작은 가게 안 옷을 짓는 엄마와 시계를 고치는 아들이 함께 일하는 공간이다. 아들의 자리는 낡은 책상, 도구에 둘러싸여 있다. 그의 아버지(고 김이현)가 50년 넘는 시간 동안 시계를 만졌던 자리다. 벽 중앙에는 그의 아버지가 작업 중에 찍은 흑백사진이 붙어 있다.
그의 책상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철제 사무용 책상이다. 오는 사람마다 바꿀 때가 되지 않았냐고 묻지만 불편하지 않아 계속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통인시장 어느 골목 안
P L A C E
사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성사’
가업을 이어받은 아들 (김승환 님)은 어렸을 때부터 시계를 만지며 놀았다.
그는 아버지 몰래 아버지가 수리하던 시계를 가져다가 부수고 다시 조립하는 놀이를 했다. 어떤 날은 몰래 가져온 시계를 다시 조립하지 못해 도망다녔다. 그렇다고 해도 아들은 시계 수리공이 자신의 업이 될 것이라고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70년 대 서촌 지역에는 7곳의 시계방이 있었다. 현재는 일성사 밖에 남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 지역에서 뛰어난 시계 수리공이었다. 지방에서도 명품시계를 수리하러 올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는 죽기 전 아들에게 가업을 이어받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은 모든 일을 정리하고 시계를 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리고 아들
I N T E R V I E W
가업을 이을 생각이 전부터 있었나요?
아들 : 처음에는 피해다녔어요. 아버님이 4년 전부터 아프시면서 일을 못하게 되었고, 제가 이어서 했죠.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한번 시계를 잡아보니 ‘내가 할 수 밖에 없겠다. 운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아버님이 수리했던 시계를 보면서 배우게 되었죠.
가족들이 가업을 잇겠다고 했을 때 반응이 어땠나요?
아들 : 지켜봐 줬어요. 그 당시 아들이 저에게 ‘아빠, 세계를 바꾼 발명품 중에 시계가 있어’라고 자랑스러워 하더라고요.


3평이 채 되지 않은 공간, 똑. 똑. 딱. 딱. 깍. 깍. 수십 개의 시계가 저마다의 박자에 맞춰 움직인다.
한 쪽 벽을 가득 메운 시계들을 바라보니 순간 어지럽기도 하다.
시계를 만든다는 것
N O W
아버지가 떠난 후
아버지가 떠난 후, 어머니는 한 동안 아들을 ‘여보’라고 불렀다. 아들은 아버지가 작업을 마치지 못한 시계를 고치며 아버지를 보았다. 아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물건과 도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고 김이현 님과 아들 김승환 님의 작업하는 모습
시계를 고치는 일은 참 예민한 작업이다.
시계를 고치는 일은 참 예민한 작업이다. 눈에 확대경을 끼고 작은 부품을 들여다보기를 1시간 남짓. 잠시 눈에서 확대경을 빼고 나면 몇 초간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한 여자 손님이 두손으로 시계를 들고 힘들게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한 여자 손님이 두손으로 시계를 들고 힘들게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제가 참 아끼는 시계인데 어제 부터 바늘이 움직이지 않아서요. 거실 벽에 붙여놓은 시계인데… 꼭 좀 고쳐주세요.‘ 그의 아버지는 생전에 시계를 감정하지 않았다. 손님이 수리를 맡기는 명품시계가 진품인지 가품인지 따지지 않았다.

굳이 안을 들여다 보지 않아도 시계가 물질적 가치를 단번에 알아볼 베테랑 수리공이지만, 시계를 사고, 시계를 선물받은 사람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 그의 철학이었다.
그가 가업을 물려받기로 마음을 먹고 나서부터 연습용 시계는 잡지 않았다. 손님의 시계를 고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시계를 만져온 터라 손의 감각은 있었다. 시계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 손님 시계를 고치기 시작했다. 100개 쯤 시계 수리를 했을 무렵, 감이 왔다. 그는 이제 시계 수리공을 넘어 시계를 만들고 와치 아티스트로서의 꿈을 꾸고 있다.


멈추지 않는 시계 바늘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재봉틀 소리, 다림질의 따뜻한 내음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참고] 일성사 대표 김승환 02-323-1713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55 통인시장 정문 입구에서 2분쯤 걸어가면 오른쪽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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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 여행에디터 박소현 localholic.life@gmail.com
시장 한 켠에서 2대 째
시계수선의 명품을 잇는 곳
작은 가게 안 옷을 짓는 엄마와 시계를 고치는 아들이 함께 일하는 공간
일 성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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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시장 골목 안. 작은 가게 안 옷을 짓는 엄마와 시계를 고치는 아들이 함께 일하는 공간이다. 아들의 자리는 낡은 책상, 도구에 둘러싸여 있다. 그의 아버지(고 김이현)가 50년 넘는 시간 동안 시계를 만졌던 자리다. 벽 중앙에는 그의 아버지가 작업 중에 찍은 흑백사진이 붙어 있다.
그의 책상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철제 사무용 책상이다. 오는 사람마다 바꿀 때가 되지 않았냐고 묻지만 불편하지 않아 계속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통인시장 어느 골목 안
그는 아버지 몰래 아버지가 수리하던 시계를 가져다가 부수고 다시 조립하는 놀이를 했다. 어떤 날은 몰래 가져온 시계를 다시 조립하지 못해 도망다녔다. 그렇다고 해도 아들은 시계 수리공이 자신의 업이 될 것이라고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70년 대 서촌 지역에는 7곳의 시계방이 있었다. 현재는 일성사 밖에 남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 지역에서 뛰어난 시계 수리공이었다. 지방에서도 명품시계를 수리하러 올 정도였다. 그런 아버지는 죽기 전 아들에게 가업을 이어받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은 모든 일을 정리하고 시계를 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리고 아들
I N T E R V I E W
3평이 채 되지 않은 공간, 똑. 똑. 딱. 딱. 깍. 깍. 수십 개의 시계가 저마다의 박자에 맞춰 움직인다.
한 쪽 벽을 가득 메운 시계들을 바라보니 순간 어지럽기도 하다.
시계를 만든다는 것
N O W
아버지가 떠난 후, 어머니는 한 동안 아들을 ‘여보’라고 불렀다. 아들은 아버지가 작업을 마치지 못한 시계를 고치며 아버지를 보았다. 아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물건과 도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시계를 고치는 일은 참 예민한 작업이다. 눈에 확대경을 끼고 작은 부품을 들여다보기를 1시간 남짓. 잠시 눈에서 확대경을 빼고 나면 몇 초간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한 여자 손님이 두손으로 시계를 들고 힘들게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제가 참 아끼는 시계인데 어제 부터 바늘이 움직이지 않아서요. 거실 벽에 붙여놓은 시계인데… 꼭 좀 고쳐주세요.‘ 그의 아버지는 생전에 시계를 감정하지 않았다. 손님이 수리를 맡기는 명품시계가 진품인지 가품인지 따지지 않았다.
굳이 안을 들여다 보지 않아도 시계가 물질적 가치를 단번에 알아볼 베테랑 수리공이지만, 시계를 사고, 시계를 선물받은 사람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 그의 철학이었다.
그가 가업을 물려받기로 마음을 먹고 나서부터 연습용 시계는 잡지 않았다. 손님의 시계를 고치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시계를 만져온 터라 손의 감각은 있었다. 시계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 손님 시계를 고치기 시작했다. 100개 쯤 시계 수리를 했을 무렵, 감이 왔다. 그는 이제 시계 수리공을 넘어 시계를 만들고 와치 아티스트로서의 꿈을 꾸고 있다.
멈추지 않는 시계 바늘 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재봉틀 소리, 다림질의 따뜻한 내음에 마음이 편안해진다.